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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사람의 슬픔을 위로 할때 해선 안될 말

장영석님 | 2011.08.21 07:16 | 조회 4352
세실 머페이

슬픔을 당한 사람을 위로함에 있어서 우리는 종종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겪고 있는 슬픔을 가중시키는 경우가 있다. 이는 우리의 선한 의지와는 별개로 우리의 부적절한 반응이나 행동으로 인해 발생하게 된다. 그렇다면 슬픔을 당한 사람들을 위로할 때,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1. 부주의한 성경 인용

나는 적어도 다른 할 말이 없기 때문에 성경을 인용하지는 말라고 권하고 싶다. 만약 당신의 마음에 이 구절이 평안을 줄 것이라고 느껴지는 말이 떠오른다면, 나누어도 좋다. 하지만 긴 설교나 심오한 해석이 필요한 구절이라면 인용하지 말라. 특히 필요한 말씀을 요청하지 않았을 경우에 그렇다.

2. 무성의한 답변

슬픔은 마치 가족을 위로하는 것 같은 친절한 영혼을 필요로 한다.
6살 난 아들이 사고로 죽은 일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지.”라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한 남자가 다가와 그 어머니에게 “댁의 아드님은 지금쯤 아마 천상에 올라 영광스러운 찬양을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 천사들의 성가대에 또 다른 목소리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분명 이 남자는 위로의 말로 이 말을 건넸다. 하지만 나중에 그 어머니는 내게 찾아와, 거의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정말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성가대로 사용하기 위해서 데려가시는 것인가요?”
이보다 더 나쁜 것도 있다. 15살 난 소년이 캠핑 사고로 죽은 후, 한 성도가 그의 아버지에게 찾아와 말했다. “만약 당신이 그 애를 주일에 캠핑을 보내지 않았다면,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게 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 하나님의 가족과 함께 해야 합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벌하신 것입니다.”
또 다른 성도는 이들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원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당신들이 이해하기를 원합니다. 분명 이것은 사탄이 꾸민 일일 것입니다.”
이렇게 신학적으로 의심스러운 점들을 지적하는 것은 결코 좋지 않다. 하지만 더 나쁜 것은 이들이 위로의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다.
슬픔을 당한 우리의 가족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에 대한 확신이다. 신학적인 강의나 어떻게 죄의식을 느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아닌 것이다.

3. 슬픔의 표현을 금하는 것

우리 모두는 인생의 역경에도 다르게 반응한다. 이는 마치 우리가 기쁨에 대한 표현방식이 사람마다 다른 것과 같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지낸 지 1주일 후, 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은 적이 있다. 당시 어머니는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곤 모든 면에서 잘 지내는 듯 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내가 우는 걸 원하지 않아.” 이 말을 하곤 어머니는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하셨다. 모든 사람들은 사려 깊게 그녀의 감정을 절제하게 했으며, 그녀의 슬픔을 멈추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말했다. “그들이 나를 혼자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어.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은 목놓아 우는 것이고 그것이 지금의 슬픔을 이기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단다.”
나는 어머니께 그녀의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마음껏 울라고 말씀 드렸다. 어머니는 그렇게 하였고, 2주 후 내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그래 지금도 나는 울고 있단다. 나는 사무엘을 그리워하고 있어. 하지만 더 이상 울지 않을 생각이란다.”

4. 과보호

한 사람이 슬퍼하는 것을 외면하는 것만큼 나쁜 것은 그 사람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대하는 것이다. 집에 방문하여 전화를 받아주고 손님을 대신 맞이하는 것은 친절한 행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그들을 보호함으로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방해를 하는 경우가 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전화벨이 자주 울렸다. 내 여동생 중 한 명은 그녀가 생각하기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만 어머니와 통화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예를 들어 어머니의 친구들일 경우에는 통화를 할 수 있도록 하였지만, 친척들의 경우에는 통화를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내 생각에 특정인과만 통화를 하도록 하거나 울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과보호라고 느껴졌다. 나의 원칙은 간단하다. 그냥 본인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메리랑 통화하기 원하세요? 존이 전화 왔는데, 통화 괜찮으세요?”

5. 슬픔을 강요하는 것

당사자들이 슬퍼할 수 있도록 그들이 눈물 흘리는 것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은 어쩌면 과보호만큼이나 해로운 일일지 모른다. 최근 들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강조하는 글들을 우리는 자주 접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눈물은 슬픔의 당연한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막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슬퍼한다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꼭 눈물을 보여야만 하는 것일까?
예를 들어 장모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나는 진심으로 슬펐다. 하지만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나의 슬픔을 사람들 앞에서 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례식 전날 밤, 모든 친구들이 돌아갔을 때, 나는 가족들에게 나 혼자 예배당에 몇 분간만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이 떠난 후, 나는 관 앞에서 서서 울었다. 그런 다음 나는 결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아는 이들 중에는 내게 다가와, “마음 놓고 울어. 괜찮아.”라고 위로해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에 그렇게 하기를 원했다.
우리의 역할은 다른 사람이 적절히 슬퍼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책임은 그들이 혼자된 후 그들을 돌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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